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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CK/ 제 3 문화 아이들/한글

대한제국의 의민태자(영친왕), 역사에 빼앗긴 인생과, 그의 정체성 II





 날씨가 저기압입니다.

 덕분에 린지도 폐인의 상태입니다.

 어제 저녁부터 치오가 기운이 없어서 신경 쓴 탓에 더욱 아.....
병원 가봤는데 일단은 괜찮고 며칠 지켜보라는데, 제발 , 아침에 우는거 때문에 혼낸걸로 삐쳐있는 것 뿐이었으면 좋겠습니다ㅜ_ㅜ












 어린나이에 외국에 건너가는 것을 가볍게 여기는 사람들이 많다. 


 "잘 적응 하겠거니"의 심정이랄까.


 사실, 인간은 억척스러운 생물이기 때문에, 물-공기-먹을 것-다른 인간, 만 있으면 여차여차 잘 산다. 그러니 가족 단위로 해외에 나가는 사람들은 흔히 아이들이 얼마나 큰 충격을 묵묵히 견뎠는지 알기 힘든 경우가 많다. (본인도 자각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고, 다만 무의식 중에 남아있을 뿐.)




 저번에 이어 의민태자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한다.

 >>대한제국의 의민태자(영친왕), 역사에 빼앗긴 인생과, 그의 정체성 I


 ~~~

 그래서 전편에서 나온 것과 같은 경로로 일본에 갔다.


 11살의 나이에 가족과 떨어지는 경험을 하는 건 슬펐겠지만, 친할아버지처럼 대해 준 이토 히로부미도 있었고, 일단은 일본의 왕실생활을 하게 되었으니 적응하고 '왜놈'처럼 잘 살지 않았겠냐-하는 생각이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의민태자가 직면한 상황은 너무 낯설었다.




 조선궁의 특성상, 많은 일들이 궁녀들의 손에서 이루어진다. 의민태자도 일본으로 떠나기 전까지는 유모의 손에서 자랐고, 주로 황실의 여성 가족들과 지냈을 테고 생각시들과 뛰어놀았다. 이 부드럽고 안락한 분위기에서, 일본으로 간 그는 철저히 남성들의 손에 맡겨졌다.
 수행원과 경호원 모두 남성이며, 그를 가까이에서 '모신' 이토 히로부미도 '남성의 극치'를 자랑하는 인물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말씨도 행동도, 그를 보는 눈빛도 모두 달랐다. 강보에 쌓여있다가 복도에 내던져진 아이의 기분이었을까.


 그를 둘러싼 성별의 변화를 시작으로 의민태자는 세계가 뒤집히는 것을 경험하기 시작했다.


 전통적으로 문치주의 국가인 조선의 교육과 다른, 사관학교에서 군사교육을 받게 되었다. 이 분위기 차이는 언뜻 이해가 가지 않을 수도 있지만, 상당했을 것이다. 기본적으로 '윤리'를 강조하는 세상에서 '폭력'을 정당화시키는 사회로 넘어갔으니.




 한편으로는 이 때의 훈련이 앞으로 닥쳐올 험난한 인생을 버티는 끈기를 길러줬을지도 모른다고 어느 책의 저자가 말했다.




 워낙 유순한 성품의 소유자에 문화를 사랑하는 사람이었으니, 그런 강력한 정신력 없이는 진즉 무너졌을지도 모른다.




 여기서 의민을 TCK의 렌즈로 조명해보자면,


 그는 고국의 교육체계에서 벗어나 새로운 사고법을 익혔다. 당시 너무 [문] 위주로 돌아가느라 있는대로 약해져버린 조선의 현실에, 그에게 기회가 주어졌다면 훌륭한 업적을 남겼을지도 모른다.
 실제 그를 만난 이형근이라는 사람이 쓴 의민태자에 대한 책 중에는 , 대한제국이 일본 앞에서 무너져버린 것이 문존무비 사상으로 인한 약한 국력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는 내용이 나온다. 물론, 여기서 미묘한 문제는 그가 일본 사람들 틈에서 자랐기 때문에 일본측이 행한 비열한 조작 한국인이, 한국인으로, 한국에 대해 알아야할 이야기_ 동경대생들에게 들려준 한국사, 에 대해 잘 알지 못해서 그런 발언을 했을 수도 있다.
 



 이런 발언으로 많은 TCK들이 비TCK인 고국의 사람들과 대화를 하다 오해를 받기도 한다.



 하지만, 설령. 그가 알고 있었음에도 그런 말을 했다면 그 심정은 충분히 이해가 간다. 일본이 아무리 그런 말도 안되는 쇼를 행했어도, 한국의 국력이 강했더라면 (사관학교에서 배운 군국주의 정신처럼) [밀어버리면] 그만이었을텐데, 그런 힘이 없었던 것은 사실이고, 완벽히 갖추지 못했던 것에 대해 안타까워 하는 말이었을 가능성에 더 무게를 싣고 싶다.




 다시 의민태자의 일대기로 돌아와서, 


 
 그런 그의 결혼마저 일본의 놀아난 분위기였다. 고종은 이미 명성황후의 집안에서 뽑은 민갑완이라는 규수가 이미 의민의 배우자로 정해져 있는 상황이었는데, 일본은 왕족인 니시모토 마사코(이방자)를 '알아서' 준비해 결국 의민과 혼인을 시켰다. 일본측에서는 이 사건에 대해 고종이 쌍수들고 환영이라도 한 것처럼 표현을 했다. "일본 왕실과 한 가족이 되었구나"라는 감상에 감격을 했다는 것 처럼. 뭐, 말이 되지 않는다는 것 쯤은 누구나 알 것이다. 민씨 집안의 처자를 정혼자로 낙점할 만큼 명성황후에 대한 생각이 각별했던 고종이, 칼에 피를 묻힌 일본과의 결혼을 즐거워했을 리는 만무하다.



 안타까운 비화로는, 한 번 태자저하와 '연이 맺어졌다'는 이유로, 민갑완은 평생 수절을 했다는 사실이다. 조선측에서 얼마나 진지하게 배우자를 준비해뒀는지 감이 잡히는 부분이다.




 의민태자의 기구한 인생은 계속 되었다.


 해외 여행중에 상하이의 독립운동가에게 납치될 뻔하고, 간도 대지진 때 '조센진'이라는 이유로 신변이 위험해 일본 왕궁에서 겨우 피신을 해야하는 일도 있었지만,



 가장 끔찍했던 사건은 1922년에 일어났다.


 일본에서도 어느정도 자리를 잡으면서 이방자여사(의민태자비O)와 함께 조선을 방문했을 때였다. 당시 한 살 정도된 아들 ''을 동행했고, 여러 왕족을 찾아뵙고 다시 한국식으로 결혼식도 올렸다. 일본여자와 결혼을 했지만, 황실을 잇는 인물로 도리를 하러 왔으니 나쁘지 않은 방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비극은, 일본으로 돌아가기 전 날 밤 일어나고야 말았다.


 바로 '진'이 새파랗게 질린 채 우유를 토하더니 그대로 숨지고 만 것이다.


 운명의 장난 같은 사건이었다.

 '일본과 한 핏줄'이 되었다는 이유로 한국인이 저지른 일이었을 수도, 조선의 대를 끊어놓겠다며 일본인이 그랬을 수도, 혹 , 우연일 수도 있다.

 어쨌든 분명한 것은, 진이 죽었다는 사실이었다.


 책에 나온 그 때에 대한 태자비의 심정 글은 대충 이러했다. 일본인도 한국인도 아니지만, 한국의 대를 이을 아이가, 그나마 조상들이 계신 한국땅에서 최후를 맞이한 것을 작은 위로로 받아들여야하는 것인가. 하고.
















 너무 무거운 것 같아 이번에도 짤막하게 끝내겠지만, 지난 번처럼 시간 안 끌게요ㅜㅜㅜㅜ

 다음은,

 의민태자의 생존법이라든지, 이후의 환경. 그를 유추해볼 수 있는 행적들을 포스팅하고 의민태자에 대한 내용은 마무리 할겁니다^*^





TCK포스팅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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